영화 쇼생크 탈출과 라투르의 창설
최종덕 씀
오래전 영화 『쇼생크 탈출』을 다시 봤다. 영화 전편이 아니라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Frank Darabont)의 인터뷰를 설명하는 해설판을 본 것이다. 주인공 앤디가 확성기를 통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음악을 교도소 전체에 퍼뜨리는 장면은 역시 살떨리는 감동이다.
감독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장면은 스티븐 킹의 원작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 소설에는 없었는데, 당시 그 아리아 음악에 빠졌던 감독이 새로 만들어 넣은 장면이었다고 말한다.
감독의 이야기가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그 장면을 요구하고 새로운 각본을 이끌어냈다는 뜻이다. 그는 말한다. “Half the stuff I do, I don't know why or how it happens as I'm doing it.” (내가 하는 일의 절반은 내가 그것을 하면서도 왜,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해설판에 따르면 아리아에 나오는 피가로와 수잔나의 이중창의 가사는 영화가 의도한 자유와 희망의 의미와 절묘하게 맞는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음악의 가사를 모른다. 그런데도 그 음악과 영상의 앙상블이 뭔지 모를 깊은 감응을 나에게 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좋았을 뿐이다. 주인공 엔디(팀 로빈스)의 동료 레드(모건 프리먼)도 비슷하게 말한다. 그 음악을 들은 레드는 말한다. 음악의 내용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라고.
레드의 말을 통해서 감독 다라본트는 음악의 감동을 영화의 창작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감독이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감독을 창조한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음악과 감독 사이의 관계는 작가가 창작물을 창작한다는 작가 중심의 일방향적 창조의 관계가 아니라 창작물이 작가를 창조하기도 한다는 작가와 창작물 사이의 양방향적 창조 관계를 암시한다.
이런 양방향적 창작을 철학자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창작 creation이라는 말 대신에 예술철학자 수리오 Étienne Souriau의 표현대로 “창설”instauration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창설” 보다 “창성”創成으로 하고 싶지만 기존 번역을 존중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라투르가 말한 원래의 창설 개념은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사물이 서로 작용하면서 어떤 존재가 현실 속에서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중심, 작가중심, 과학자 중심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 예술가와 작품, 과학자와 발견사실, 감독과 음악이 서로를 움직이고 서로에게 변화시키면서 어떤 것이 생성되는 과정이 “창설”의 핵심이다.
이 점에서 라투르의 철학은 기존 해석처럼 과학자나 작가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구성주의”로 제한되지 않으며 관계망 철학을 잘 보여준다. 라투르에게 창설instauration은 단순한 인식론적 창작론이 아니라 주체/객체, 인간/사물, 발견/창조, 작가/창작물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관계네트워크(관계망)의 존재론 개념이다.
라투르의 관계망 철학이 과학에 적용된다면, 과학자는 자연을 일방적으로 표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험 장치, 물질, 데이터, 동료, 이론과 함께 사실을 성립시키는 사람이 된다.
정치에 적용된다면 정치가는 사회를 설계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다양한 인간·사물·제도·환경이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는 사람일 뿐이어야 한다. 라투르의 정치철학에 따르면 시민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은 정치인으로 존립할 수 없다.
라투르에서 정치는 직업 정치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정치는 시민의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시민의 능동적 참여에서 정치는 시작되며, 그런 참여의 관계망에서부터 정치는 변화될 수 있다.
예술에 적용된다면, 예술가는 작품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에 응답하는 사람이다. 상호응답 과정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창작물과 작가가 새로이 탄생된다.
창설의 예술철학1